Buyeo kingdom부여(夫餘)←
2nd century BC–494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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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italBuyeoseongLanguagesBuyeoReligionKorean shamanismGovernmentMonarchyKing - ?–?Hae Mo-su? - 86-48 BCHae Buru - ?–494 ADJanHistorical eraAncient - Established2nd century BC - Disestablished494 AD
Buyeo or Puyŏ (Korean pronunciation: [pujʌ]), Fuyu in Chinese, was an ancient kingdom located from today's Manchuria to northern North Korea, from around the 2nd century BC to 494. Its remnants were absorbed by the neighboring and brotherhood kingdom of Goguryeo in 494. Both Goguryeo and Baekje, two of theThree Kingdoms of Korea, considered themselves its successor nation.[1]
Although records are sparse and contradictory, it is speculated that in 86 BC,Dongbuyeo (Eastern Buyeo) branched out, after
which the original Buyeo is sometimes referred to as Bukbuyeo (Northern Buyeo). Jolbon Buyeo was a small tribal state situated in north of the Korean peninsula and Manchuria. According toSamguk Sagi, in 504, the tribute emissary Yesilbu mentions that the gold of Buyeo can no longer be obtainable for tribute as Buyeo has been driven out by the Malgaland the Somna and absorbed into Baekje. It is also shown that the Emperor Shizong wished that Buyeo would regain its former glory. In 538, long after the fall of Buyeo, Baekje renamed itself Nambuyeo (Southern Buyeo).
"Buyeo" may also refer to a Baekje surname or Buyeo County in South Korea.
Buyeo kingdom부여(夫餘)←
2nd century BC–494 AD→
백제의 역사를 고스란히 가지고있는 부여!
이처럼 잘 알려진 백제 당나라 군대에 의하여 멸망되었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부여는 ...
신라가 시종일관 경주를 고수했으나, 백제)로 몇 차례 수도를 옮겼다.
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7세기 초의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 설화에 따르면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함께 내려온 뒤 비류는 미추홀에, 온조는 ...
부여에 뿌리 두고 동아시아로 뻗어가다 ... 또한 <일본서기>에는 백제 멸망 뒤 4천 명에 이르는 백제인이 바다를 건너 .
백제 침류왕 때 불교가 전래된 이후, 사비 도읍기는 불교가 가장 융성한 시기로 일본에 까지 불교를 전파하였으며, ...
《삼국사기》권25 백제본기(百濟本紀)3의 개로왕(蓋鹵王) 21년(475년)조에는 목협만치(木劦滿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데, 백제의 수도 위례성(尉禮城)으로 쳐들어온 고구려군의 공격 앞에서 개로왕이 죽음 직전에 피신시킨 왕자 문주(文周)를 호종하여 남쪽으로 갔던 인물이다.[4]
1971년 일본의 사학자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에 의해 처음으로 소가 씨(蘇我氏)의 시조인 소가노 마치(蘇我滿智)와 목만치를 동일인물로 보는 주장이 등장하고, 나아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목만치」와 「목협만치」를 동일인물로 추정하는 설이 제기되었는데[5]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제기된다. 「목만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일본서기》오진키(應神紀) 25년은 서기로는 414년에 해당하고, 《삼국사기》에 「목협만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개로왕 21년으로 서기로는 475년에 해당하여, 양자간에 시대가 맞지 않는다. 더욱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목만치의 아버지 목라근자가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369년, 백제가 왜병과 함께 가야 지역을 공략할 때로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왜병과 함께 가야 지역을 공략하기 전에 「(백제와 왜의 군사들이)함께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부수었다」는 기록을 싣고 있는데 목만치가 태어났다는 「討新羅時」라는 사건의 시점은 바로 여기이며, 369년에 태어난 목만치가 475년의 목협만치와 동일인물이라고 하면 양자간에 백여 년에 가까운 차이가 있다.[6] 때문에 목만치와 목협만치는 동일인물이 아니라 동명이인으로 파악되곤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목협만치와 《일본서기》의 목만치의 활동 시기가 서로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목만치의 탄생과 관련한 부분에 대한 해석에서 시작되는데, 목만치의 탄생 시점이라고 밝히고 있는 「討新羅時」라는 시점을 굳이 369년으로만 고정시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삼국사기》에 따르면 목라근자가 활약할 당시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인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일본서기》신공기 49년조의 1년전, 3년전에 해당하는366년과 368년에 백제와 신라 사이에 화친이 성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7] 더욱이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新羅本紀)3의 내물 이사금 18년(373년) 백제의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투항하자 근초고왕이 그들을 송환해줄 것을 신라에 요청하면서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친 백성을 받아들임은 화친한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으로 볼 때 《삼국사기》에서 366년과 368년에 맺어졌다는 백제와 신라 양국간 화친은 373년까지 깨어지지 않고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무턱대고 어느 한쪽의 기록만을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8]
한문 기록의 특성상 「討新羅時 聚其國婦 而所生也」라는 《일본서기》의 기술이 실제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상당한 시차를 두고 벌어진 일들을 마치 한꺼번에 일어난 일처럼 뭉뚱그려서 적어놓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우선 목만치가 태어났다고 기록된 369년이 한창 가야 지역에 대한 군사행동이 이루어지던 와중이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상식적으로 굳이 정복사업이 한창 바쁜 시기에 만사를 제쳐두고 부인부터 맞아들인다는 것부터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부인을 맞아들였다고 해서 기록된 것처럼 그렇게 빠른 시기에 임신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출산한 아이가 아들이라는 보장도 없으며(딸이 태어나는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상황을 감안할 때 목라근자가 가야 평정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을 가야 지역에서 머무르다가 현지에서 부인을 맞아들였을 것이고[9] 이러한 혼인관계상 부인은 「현지처」로서 젊고 예쁜 여자가 되기 십상이며 여기서 태어난 아들인 목만치가 아버지 목라근자와 한참 나이 차이가 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즉 「목만치」는 「목협만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목만치」와 「소가노마치」
그러나 여전히 목만치가 과연 소가노 마치와 동일인물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 백제의 명문 씨족인 목만치가 굳이 자신의 성을 버리고 소가 씨를 자칭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점.. 소가노 마치의 손자는 소가노 고마(蘇我高麗)로서 고려(고구려)를 지칭하는 이름이었는데, 백제의 명문 씨족이 굳이 「고려」라는 단어를 손자의 이름으로 지을 이유가 없다는 점.[10]
《일본서기》「오진키(應神紀)」는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하여 목라근자(木羅斤資)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목라근자는 마찬가지로 《일본서기》에만 이름이 보이는 백제의 장수로서, 근초고왕(近肖古王) 24년에 해당하는 369년 당시 백제-왜의 연합군이 신라를 쳐부수고 가야 지역을 평정할 때 백제군을 지휘하였고, 이때 얻은 신라인 여자에게서 목만치를 낳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후 목만치는 아버지 목라근자의 공으로 임나의 일을 도맡아보며 백제와 왜 양국을 오고갔으며,오진 천황 25년(294년, 보정연대 414년)에 직지왕(直支王)이 죽고 구이신왕(久尓辛王)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1] 국정을 장악하였다.[2] 왕모(즉 구이신왕의 어머니인 팔수부인)와 간통하여 온갖 무례한 행동을 저지르는 등 권세를 휘두르며 전횡하였고, 왜의 오진 천황은 그것을 듣고 목만치를 왜로 불러들였다고 한다.[3]
목만치(木滿致, 403년~475년)는 백제(百濟)의 귀족이자 관인, 무장이다.
「목만치」라는 이름 자체는 일본측 자료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하고 한국의 자료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등장하는 목협만치(木劦滿致)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있다(이 설을 긍정할 경우 목만치는 475년까지 살아있었던 셈이 된다)
노중국은 사지비궤가 가라국을 쳐서 멸망시켰다는 기술에 대해 사지비궤 즉 백제 사씨 세력의 동향과 연관시켜 살펴보아야 하며, 함께 가야 7국을 평정하는데 일정한 공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목라근자가 가야 지역의 조부 통책권을 장악하게 된 것에 반발한 사씨 세력간에 벌어진 분쟁에서 사씨 세력은 일시 승리했지만(가라국 멸망) 목라근자의 군에 의해 가라국이 흥복되고 사지비궤도 석굴에 들어가 죽었다는 것은 사씨 세력이 목씨(목협씨) 세력에 밀려났음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목라근자, 목씨 세력은 가야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더욱 확실하게 장악하게 되었고 그 바탕 위에서 목라근자의 아들 목만치가 가야 지역에서 '전횡'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노중국, 같은 책, p.159).
목라근자(木羅斤資, 생몰년 미상)는, 백제(百濟) 초기의 귀족이자 관인, 무장이다.
출자편집
일본측 자료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만 등장하고 한국의 자료에서는 보이지 않는 인물이며, 근초고왕의 명으로 왜병과 함께 가야 지역 및 마한 평정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목(木)씨(목라木羅씨)에 대해 이도학은 과거 마한 연맹체의 맹주였던 목지국(目支國)의 신지(臣智) 즉 진왕(辰王) 가문으로 고이왕대에 백제 남부(南部) 핵심 세력으로 편입된 집안이었으며, 가야 세력의 전신이기도 한 변진(弁辰) 12국은 과거 진왕에게 속하여 있었고 특히 변진 세력의 핵심세력이던 안야국(안라)·구야국(금관가야) 두 소국은 진왕으로부터 우호(優號)를 내려받는 등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던 데서(《삼국지》위지 변진전) 훗날 가야 평정의 임무를 목씨 집안의 목라근자가 맡는 기틀이 되었을 것으로 주장하였다.
일본 학계에서는 목라근자를 백제의 장군으로 보면서도 왜국이 백제에 파견한 왜인인지 아니면 임나인 계통인지 불분명한 점이 있음을 들어 목라근자가 백제인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을 회피하거나, 목라근자가 신라를 치면서 신라인 여자를 아내로 얻어 낳았다는 아들 목만치가 아버지 목라근자의 공으로 임나의 일을 도맡았다는 《일본서기》오진키(應神紀) 25년조의 분주(分註)의 내용을 들어 임나 지역의 일을 맡아본 목라근자는 당연히 왜의 장군일 것이고 백제의 장군이라고 표기한 진구키(神功紀)의 주석은 잘못되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지만[1] 백제인인 목라근자가 신라인 내지 가야인 아내를 얻고 백제인으로서 소위 '임나'의 일을 보면서 백제와 왜를 오갔다고 볼 수도 있기에 굳이 진구키의 주가 잘못되었으며 목라근자는 왜의 장군, 이라 보아야 할 결정적 근거가 없고 더욱이 천황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한 《일본서기》에서 굳이 「가야 평정」이라는 중요한 공을 세운 왜인을 백제인이라 잘못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2]
백제]대성팔족(大姓八族)이란~? 8가지 큰 성씨로,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에서, 다음 8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劦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국씨(國氏), 목씨(木氏), 백씨(苩氏)
성씨별 주요 인물편집
사씨(沙氏) : 사걸(沙乞), 사타상여(沙咤相如), 사택기루(沙宅己婁), 사두연씨(燕氏) : 연신(燕信), 연회(燕會), 연돌(燕突), 연모해씨(解氏) : 해루(解婁), 해충(解忠), 해명(解明), 해구(解仇), 해수(解須)진씨(眞氏) : 진정(眞淨), 진로(眞老), 진가모(眞嘉謨), 진무(眞武), 진가(眞可), 진충(眞忠),진회(眞會), 진남(眞男), 진물(眞勿), 진고도국씨(國氏) : 국지모(國智牟)목씨(木氏) : 목라근자 (木羅斤資),목만치 (木滿致), 목윤귀, 목협금돈, 목협매순백씨(苩氏) : 백기(苩奇), 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