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뎨(上帝): 하늘을 다스리는 신, 하느님 God
셩슈무강(聖壽無疆): 聖壽, 황제의 나이, 수명. 황제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말. Long Life of His Majesty.
해옥듀(海屋籌): 장수를 송축할 때 쓰는 말. 신선이 산다는 해옥은 선학(仙鶴)이 매년 한 개씩 물고 온 대오리로 지었다는 전설이 있음.
위권(威權): 위엄과 권세, 위광과 권력. Dignity and Athority.
환영(環瀛): 천하 또는 세계
복록(福祿): 타고난 복과 녹, 즉 삶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
일신: 날로 새로워 짐.
광무 5년(1901년) 1월 27일 광무황제폐하의 황명으로 의정부 의정 윤용선(尹容善)에게 제정을 명함.
2월 19일 독일 해군 군악대장 Franz Eckert 고빙(雇聘).
9월 7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광무황제폐하 만수성탄진연 (萬壽聖誕進宴)에 초연함
광무 6년(1902년) 8월 15일에 공식 제정.
광무 8년(1904년) 5월 13일자 황성신문 기사에 「학부(學部)에서 각 학교 애국가를 정리하기 위하여 각 학교에 신칙(申飭)하되 군악대에서 조음한 국가를 효방(效倣)하여 학도를 교수(敎授)하라 함
1968년 8월 7일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박사에 의해 발견 70년 음악평론가 이상만(李相萬)씨가 87년 단국대 김원모교수가 뉴욕시립도서관에서 앨런( 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9. 4. 23 ∼ 1932. 12. 2)문서중에서 소책자 발견.
상뎨(上帝): 하늘을 다스리는 신, 하느님 God
셩슈무강(聖壽無疆): 聖壽, 황제의 나이, 수명. 황제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말. Long Life of His Majesty.
해옥듀(海屋籌): 장수를 송축할 때 쓰는 말. 신선이 산다는 해옥은 선학(仙鶴)이 매년 한 개씩 물고 온 대오리로 지었다는 전설이 있음.
위권(威權): 위엄과 권세, 위광과 권력. Dignity and Athority.
환영(環瀛): 천하 또는 세계
복록(福祿): 타고난 복과 녹, 즉 삶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
일신: 날로 새로워 짐.
광무 5년(1901년) 1월 27일 광무황제폐하의 황명으로 의정부 의정 윤용선(尹容善)에게 제정을 명함.
2월 19일 독일 해군 군악대장 Franz Eckert 고빙(雇聘).
9월 7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광무황제폐하 만수성탄진연 (萬壽聖誕進宴)에 초연함
광무 6년(1902년) 8월 15일에 공식 제정.
광무 8년(1904년) 5월 13일자 황성신문 기사에 「학부(學部)에서 각 학교 애국가를 정리하기 위하여 각 학교에 신칙(申飭)하되 군악대에서 조음한 국가를 효방(效倣)하여 학도를 교수(敎授)하라 함
1968년 8월 7일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박사에 의해 발견 70년 음악평론가 이상만(李相萬)씨가 87년 단국대 김원모교수가 뉴욕시립도서관에서 앨런( 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9. 4. 23 ∼ 1932. 12. 2)문서중에서 소책자 발견.
상뎨(上帝): 하늘을 다스리는 신, 하느님 God 셩슈무강(聖壽無疆):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ᄉᆞ 셩슈무강(聖壽無疆)ᄒᆞᄉ ... ENGLISH TRANSLATION. God help the emperor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익선관이 왜? 일본에 있는 것인가 - 증산도가 ...
gdlsg.tistory.com/m/post/38
Feb 14, 2013 - 오쳔만셰(於千萬歲)에 복녹(福祿)이. 일신(日新)케 ㅎㆍ소셔.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우소셔.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 皇帝)를 도우소셔.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메소포타미아 문명 우르제국의 우르 스탠다드와 동일한 고조선의 청동 ...
셩슈무강(聖壽無疆): 聖壽, 황제의 나이, 수명. 황제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말. Long Life of His Majesty.
하느님은 우리나라를 도우소서
영원 무궁토록
나라 태평하고 인민은 안락하여
위엄과 권세가 세상에 떨치여
독립 자유 부강 을
일신[5]케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 나라를 도우소서상뎨(上帝)는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영원무궁토록
나라태평ᄒᆞ고 인민(人民)은 안락ᄒᆞ야
위권(威權)이 셰샹에 떨치여
독립자유부강을
일신(一信)케ᄒᆞ소서
상뎨(上帝)는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이것을 현대 한국어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만수무강하사
큰 수명의 수를 산 같이 쌓으소서
위엄과 권세를 천하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무궁케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상뎨(上帝)난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셩슈무강(聖壽無疆)ㅎᆞ샤
ᄒᆞㅣ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ㅆᆞ으소셔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떨치샤
오쳔만셰(於千萬歲)에 무궁(無窮)케 ᄒᆞ소셔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이것을 현대 한국어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하느님 우리 황제를 보호하소서.
사구에 높이 쌓인 해안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만세소서.
멀리 온 세계에 명예가 빛나며 뻗치소서.
그리고 황실의 행복이 천세 만세토록 매일 새로이 꽃피소서.
하느님 우리 황제를 보호하소서.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사.
만수무강하사
큰 수명의 수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엄과 권세를 천하에 떨치사
오[3] 천만세에 기쁨과 즐거움이
날로 새롭게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를 도으ᄉᆞ
셩슈무강(聖壽無疆)ᄒᆞᄉᆞ
ᄒᆡ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ᄡᆞ으시고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ᄯᅳᆯ치사
오쳔만셰(於千萬歲)에 복녹(福祿)이
일신(日新)케 ᄒᆞ소셔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이것을 현대 한국어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1901년 고종의 탄신일에 덕수궁에서 처음 연주되었으며, 1902년에 정식으로 채택되었으나, 공식적으로는 1907년 순종 황제 즉위식에서 마지막으로 연주되었고, 1909년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애국창가에 대한 단속으로 인해 금지곡이 되었으며, 1910년 국권 피탈 이후에는 기미가요로 대체되었다. 실질적으로는 5년(정식 채택부터 마지막 공식 연주까지) 동안만 사용된 비운의 국가.
한국 역사 최초의 근대 국가(國歌). 허나 말했듯이 경술국치 전후에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었다.
이렇게 작곡된 시기도 어두운 시기였던데다가 음도 착 가라앉은 듯한 느낌을 주는 처량한 분위기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망국의 한이 느껴진다는 평도 있다.
최초의 애국가인만큼, 광복 이후에도 쓰여질 수 있었으나, 문제는 작곡가가 일본의 기미가요를 작곡한 에케르트(..)
여러 버전의 가사가 있는데, 이는 국내에서 공공연하게 전해지지 못하고 해외에서 동포들의 구전으로 전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2].
전체적으로 유서 깊은 영국의 국가 "God save the Queen"과 또한 비슷하다. 곡의 시작부 가사가 일치하고 (God save the king=하느님은 황제를 도우사) 곡의 끝에서 이 말을 반복하는 점도 닮았다. 심지어 곡 자체의 느낌도 "God save the Queen" 을 길게 늘이고 조금 어둡게 바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비교하면서 들어 보자. #
여담으로 한국의 카운터 테너 정세훈씨가 리메이크한 버전이 있다.
대한뎨국 애국가(大韓帝國愛國歌)
문임(文任;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 작사
Franz Eckert (1852.4.5-1916.8.6) 작곡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사*
셩슈무강(聖壽無疆)하*사*
해*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싸*으시고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뜰치사*
오쳔만셰에 복녹(福祿)이 일신케 하*소셔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소셔
하느님 우리 황제를 보호하소서.
사구(沙丘)에 높이 쌓인
해안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만세소서.
멀리 온 세계에 명예가 빛나며 뻗치소서.
그리고 황실의 행복이 천세 만세토록 매일 새로이 꽃피소서.
하느님 우리 황제를 보호하소서.
Lyrics in German, 독일어 가사
Gott beschutze unsern Kaiser,
Dass sich seine Jahre mehren
Zahllos wie der Sand am Strande,
Der sich hoch zur Dune haufet,
Dass sein Ruhm sich leuchtend breite
Weithin uber alle Welten,
Und das Gluck des Herrscherhauses
Tausendmal zehentausend Jahre
Neu mit jedem Tag erbluhe
Gott beschutze unsern Kaiser.
* ; 아래아
싸; ㅂ+ㅅ+.
뜰; ㅅ+들
※ 각주
상뎨(上帝): 하늘을 다스리는 신, 하느님 God
셩슈무강(聖壽無疆): 聖壽, 황제의 나이, 수명. 황제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말. Long Life of His Majesty.
해옥듀(海屋籌): 장수를 송축할 때 쓰는 말. 신선이 산다는 해옥은 선학(仙鶴)이 매년 한 개씩 물고 온 대오리로 지었다는 전설이 있음.
위권(威權): 위엄과 권세, 위광과 권력. Dignity and Athority.
환영(環瀛): 천하 또는 세계
복록(福祿): 타고난 복과 녹, 즉 삶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
일신: 날로 새로워 짐.
광무 5년(1901년) 1월 27일 광무황제폐하의 황명으로 의정부 의정 윤용선(尹容善)에게 제정을 명함.
2월 19일 독일 해군 군악대장 Franz Eckert 고빙(雇聘).
9월 7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광무황제폐하 만수성탄진연 (萬壽聖誕進宴)에 초연함
광무 6년(1902년) 8월 15일에 공식 제정.
광무 8년(1904년) 5월 13일자 황성신문 기사에 「학부(學部)에서 각 학교 애국가를 정리하기 위하여 각 학교에 신칙(申飭)하되 군악대에서 조음한 국가를 효방(效倣)하여 학도를 교수(敎授)하라 함
1968년 8월 7일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박사에 의해 발견 70년 음악평론가 이상만(李相萬)씨가 87년 단국대 김원모교수가 뉴욕시립도서관에서 앨런( 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9. 4. 23 ∼ 1932. 12. 2)문서중에서 소책자 발견.
대한뎨국 애국가(大韓帝國愛國歌) 소고
1.서 론
이 지구상에 있는 나라는 모두다 애국가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도 이미 한 세기 전에 벌써 애국가를 갖고 있었으나 어떻게된 연유에서인지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사실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살아왔었다.
물론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기울어 모두들 생존을 위해서 떠나야 했고 또한 고단한 삶으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잊고 살지 안았나 생각이 든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후대의 선각자들이 그 것을 찾아 연구를 하여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여 후생(後生)으로서 알게되니 반갑고 참으로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1.1. 연구 배경과 목적
여러 문헌에서 대한제국 애국가를 다루고 있으나 단편적이거나 음악사의 한 장으로서 다루고 있어 전반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으며 문헌자료도 쉽게 접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또한 그 동안 미약하게 나마 한 대한제국 애국가연주 활동에 대해서는 언급도 없는 실정이다.
근대 국민국가로 국가와 국민의 통합을 꾀하고자 한 대한제국 애국가의 존재를 널리 알려 대한제국이 그렇게 간단한 나라가 아니었음을 알리고 항일 무장투쟁에 빛나고 최초로 애국가를 연주한 시위연대 군악대를 복원하여 일반인들에게 획기적으로 인식을 확산시켜 황실복원의 위업을 달성하는 걸음을 앞당기는데 그 목적이 있다.
1.2. 연구 방법과 범위
기존의 연구 문헌들을 비교 발굴 조사하여 어떻게 작곡이 이루어지고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어떤 활동들이 있었는지 정확하고 자세하게 논하고자 한다.
2. 본 론
제 1장
1.1 개 요
애국가는 말 그대로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를 뜻한다. 애국가라는 이름으로 노랫말과 곡조가 붙여져 나타난 것은 조선 말 개화기 이후부터이다. 1896년 '독립신문' 창간을 계기로 여러 가지의 애국가 가사가 신문에 게재되기 시작했는데 이 노래들을 어떤 곡조로 불렀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는 대한제국에서 고빙(雇聘)을 하여 광무5년(1901년) 2월 19일에 들어온 독일 출신의 해군 군악대장인 Franz Eckert (1852. 4. 5 ∼ 1916. 8. 6)에 의해서 작곡되어 9월 7일 중화전에서 고종황제폐하 만수성탄진연 (萬壽聖誕進宴)에 초연을 하였고 광무6년(1902년) 황궁의 신년하례에서 연주가 되었으며 3월17일에는 황태자전하의 28번째 탄신축하로 9시 외부 리셉션에 모든 부서 대신들과 주한 외교사절들이 참석한 가운데 연주되었고 7월 1일발간 악보 500부를 독일에서 인쇄하여 50여 개국에 배포를 하였으며 8월 15일에 법률로 제정 공포한 대한제국 애국가이다.
1.2. 군악대설치
건양 원년(1896년) 러시아의 초청으로 니콜라이 2세 황제 대관식에 대조선은 4월 1일 궁내부 특진관이며 특명전권공사 민영환, 학부협판(協辨) 윤치호, 2등참서관 김득련, 3등참서관 김도일을 파견하여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 대불(大佛)호텔에 투숙 1박한 후 4월2일 인천을 출발 요코하마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桑港)에 입항 미대륙을 철도로 횡단하여 대서양을 건너 영국 불란서 독일을 거처 러시아에 도착하여 5월 26일 러시아 니콜라이 2세(Nikolai II, Aleksandrovich 1868.5.18-1918.7.17)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 한러 밀약의 사행임무를 수행하고 10월 21일 귀국 복명하였다.
복명문답기
고종: 대관식에 제 날짜에 참가하였으며 잘 갔다 왔는가?영환: 폐하가 보살펴 준 덕분에 무사히 갔다 왔습니다.고종: 군사제도상 배치한 제반 절차가 과연 어떠하던가?영환: 군사제도는 일체 서양나라들과 같은데 전국이 군무에 진력하여 강한 나라로 되었습니다.
또한 각종 남녀학교가 있어 인재를 교육하여 길러내고 있었습니다.
풍속이 다른 서양법을 취할 수는 없겠지만 군무와 학교 그리고 정치의 본보기에 관해서는 모방하여 시행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민영환 특명전권공사의 은밀한 교섭으로 그의 사행기록인 해천추범(海天秋帆)에도 교관의 고빙에 대한 한마디 언급도 없이 복명문답에서 “군무와 학교 그리고 정치의 전범에 관해서는 모방하여 시행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至於軍務政治典範 不得不 而行之矣).”라고 언급하면서 한러밀약에 따라 직설적인 표현을 회피하고 암시적으로 언급하면서 러시아 군사교관을 고빙해서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정치제도의 도입을 강력히 시사해주고 있다.
러시아 군사교관 고빙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기록은 속음청사(續陰晴史)에 “부아(赴俄)대사 민영환이 육로로 귀국 러시아인 2명을 대동하고 어제 입성했다(帶俄二名 昨日入城)”라고 짤막한 기사만 있고 앨런의 기록에 의하여 “러시아의 프챠타(Putiata)대령이 사관3명(아파나셰프중위 식스텔소위 두 참모장교와 군의 軍醫) 군인(러시아 공사관을 호위하던 코사크 훈련 하사관) 10명을 동반하고 한국군대를 조련시키기 위하여 도착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곧바로 그 해 말부터 건양 2년(1897년) 2월 8일까지 친위대에서 뽑은 1070명을 1개 대대로 3월 29일 시위대(侍衛隊)로 복치(復置)하고 조련하였다.
다시 민영환은 건양 2년(1897년) 1월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주구(駐歐) 6개국 전권공사로 각 나라에 가서 편리한대로 주재하면서 사신의 일을 겸하여 맡아보게 하고 이어 2월에는 부영특명대사에 임명되어 3월 24일 출발하여 오류동(梧柳洞)에서 점심을 들고 인천에 도착 대불(大佛)호텔(Daibutsu Hotel)에서 숙박한 후 3월 28일 러시아 기선 울라지미르(Vladimir)호로 출항 중국 개항장 지부(芝 Chefoo)로 향발했다. 상해 나가사키 홍콩 싱가포르 인도양 항행 수에즈운하 오데사(Odessa) 러시아 우크라이나 공화국 기차로 페테르부르크 영국 런던에 도착 6월 21일 버킹엄궁을 예방 빅토리아여왕(Qeen Victoria, 1837 ∼1901. 1) 즉위 60년 축하식(Queen's Diamond Jubilee)에 부영대사(赴英大使)로 참석하였다.
그후 광무 3년(1899년) 6월 8일 독일 하인리히(Prinz Heinrich) 친왕의 공식방한에 고종황제가 베푼 축하연에 독일 군악대를 대동하여 황제폐하 앞에서 연주를 시켜 양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 중의 하나로 이러한 과정 등에서 많은 의전행사의 경험으로 대한제국도 그와 같은 의전용 군악대의 필요성을 깨닫고 궁내부 고문관 미국인 리젠더(C. W. Legendre 1895. 6. 7∼1899)와 탁지부 고문관 겸 총세무사(總稅務士)로 있던 영국인 맥래비 브라운(Mcleavy J Brown 백탁안 柏卓安 1892. 11 ∼ 1897. 10. 1차, 1898. 3 ∼ 1905. 11 2차) 때에 견적 및 구체적인 계획을 작성하여 광무 4년(1900년)에 12월 군악대 창설 칙령을 공포하게 되었다.
칙령 제59호: 군악대 설치하는 건
제1조: 군악 2개대를 설치하여 1개대는 시위련대(侍衛隊)에 부속하고 1개대는 시위기병대(侍衛騎兵隊)에 부속할 사(事).
제2조: 군악대에 직원은 좌개별표(左開別表)의 의할 사.
제3조: 군악대의 소속 직원봉급은 개국 504년 칙령 제68호 무관병 상당관관등(相當官等) 봉급령 제1조에 준하여 일반관리관등 봉급령에 의할 사.
제4조: 본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할 사.
군악대 1개대 직원별표: 관등 직명 인원
1등군악장 대장 1인
계 51인
광무4년 12월 19일
어압 어쇄 봉
칙 의정부 참정
조 병 식
이로써 군악대 2개대를 새로 창설하여 1개대는 시위대에 부속케 하고 1개대는 시위기병대에 부속시키는데 1개대의 정원은 대장·부장 등 모두 51명으로 편성하였다.
1.3 음악교사의 고빙
이 시기쯤 우리나라의 경우 신호나팔로서 서양 음악 제도를 들여온 최초의 사람은 이은돌(李殷乭 ? ∼ 1885)이었다. 조선의 근대식 군대에 나팔수를 편성시킨 최초의 선각자인 이은돌은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조직되면서 일본 육군중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가 교관을 맡게 되자 우리 조선인으로서 나팔수 한 명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그 해 11월 일본 교도단 기본 군악대에 유학 길을 올라 프랑스 지도자 다그롱 (Gusave Charles Dagron)에게 코넷(Cornet)과 신호나팔 악대교육 군사교육을 피나는 훈련과 노력으로 7개월 과정을 5개월만에 마쳐 주위를 놀라게 해 고종19년(1882년) 6월 17일자 동경일일신문에 이은돌에 관한 기사가 나기도 한 그는 10월 22일 귀국하자마자 군악대를 조직하는 등 신식군대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이은돌은 고종21년(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가담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고종22년(1885년) 6월 1일 귀국 후 돌연한 사망으로 지도자가 전무한 상태로 시위연대 시위기병대 군악대 친위연대의 곡호대(曲號隊) 그리고 각 지방 진위대(鎭衛隊)의 곡호대가 있었다.
광무 3년(1899년) 6월 8일 독일 하인리히(Prinz Heinrich) 친왕의 방한에 대동한 독일군악대가 고종황제가 베푼 축하연에서의 연주와 덕어학교의 창설로 독일군제에 관심을 끌어 고종황제와 하인리히간에 독일 음악교사의 초청문제가 구체화되어 외부대신 박제순은 독일측에 추천을 의뢰하여 주한 독일총영사 바이페르트 (H·Weipert 와이벽 瓦以壁)가 중재를 하여 Eckert를 고빙케 되었다.
Eckert는 일찍이 일본 해군군악대·육군군악대·궁내성 아악과 교사 등을 역임하고 일본국가'기미가요'제정에 심의의원으로 참여했고 편곡을 했다. 그는 1852년 4월 5일 독일 슐레지엔(Schlesien)주판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음악의 재능이 뛰어나 브라우라우(Braulau)음악학교와 브레슬라우(Breslau)의 드레스덴(Dresden) 음악학교에서 오보(oboe)와 음악이론을 전공 졸업을 하고 프러시아 육군 군악대에 들어가 병역을 마치고 빌헬름 하겐(Wilhelm-Hagen)에서 해군 군악대장(소위)으로 임명되어 근무하였으며 이때 주일 독일 명예영사 베어의 주선으로 독일 해군성의 허가를 얻어 1879년 3월 그의 나이 28세 때 일본으로 초빙되어 1870년 9월 영국인 John William Fawton에 의해 창설된 일본해군 군악대 교사로 부임하여 21년간 임무를 마치고 독일로 돌아간 것은 1900년 그의 나이 48세 때였다. 이때 독일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Ⅱ)는 Eckert에게 명예 프로이센 왕실악장이란 칭호를 주었다.
그가 1900년 2월 동경에서 그의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발덴부르크(Waldenburg)의 노이로데(Neurode)에서 채 1년도 쉬지 않고 있는데 대한제국으로부터 군악대 창설과 그 지도를 위한 초청을 받고 3년 기한의 고빙(雇聘) 계약을 수락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광무 4년(1900년) 12월 8일자 황성신문은 아래와 같이 보도하고 있었다.
“향일(向日) 조정에서 덕국(德國 독일) 악사(樂師) Eckert를 고빙하였는데 기한은 3년이오, 월봉은 3백원(元)이니 동씨(同氏)가 악기를 휴대하고 덕국으로부터 일전(日前) 발정(發程)하여 도한(到韓)한 후 재경(在京) 각대의 군악을 교수(敎授)할 터이다.
사(査)컨대 씨(氏)가 일본에 체류한지 20년이나 기(其)해육군의 군악을 교수하였는데 해국(該國) 삼등훈장을 수사(受賜)하고 방금 해고(解雇) 귀국중이라.”고 하였고
광무5년 (1901년) 2월 19일 서울에 도착하여 2월 28일자에는
“원수부에서 고빙한 군악대 교사가 작일(昨日) 한성에 들어왔는데 덕국 공사 와이벽(瓦爾壁)씨가 대동하고 폐현(陛見)하기를 청하였더라.”
또 3월 14일자에
“군악대 교사를 고빙 하였음은 전보에 기(記)하였거니와 육군 부장 이윤용(李允用)씨가 해(該)대장이 되어 현금(現今) 대규(隊規)를 조직하더라.”고 하였다.
고빙 계약은 광무6년(1902년) 4월5일에 대한국 군부 외부 위정립합동서(爲訂立合同書)라는 이름의 계약서에 군부 관방장(官房長) 한진창(韓鎭昌)과 외부 교섭국장 이응익 사이에 전체 9개 조항에 한국어를 비롯하여 독일어와 중국어로 작성하여 체결되었다.
제 2장
2.1 Franz Eckert의 군악대 조직
▲ 대한제국 군악대가 1904년 5월 6일 창덕궁에서 열린 '러일전쟁 승전 기념식'(공식 행사명은 '황군 전승 축하회')에서 연주하는 모습. 고종을 비롯해 내각 대신들까지 참석했다. 행사 직전, 일본군은 만주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압록강 너머에 있는 구연성을 점령했다(1904.5.1). <러일전쟁사진화보>에 게재된 사진이다.
Eckert는 시위연대 군악대 교사라는 직위를 갖고 모두 27명의 대원으로 4개월만에 완전한 군악대를 만들어 9월 7일(음력 7월 25일) 아침 고종황제폐하 만수성탄진연(萬壽聖誕進宴)에 초연을 하였다.
Eckert의 장녀 Amalie Martel도 Franz Eckert , mein Vater der Composist der Japanischen National Hymn Kimigayo에서
“나의 아버지는 1901년 초두 본국을 출발하여 2월 19일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파고다 공원에서 음악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생도들 가운데서 선발하여 음악단을 조직하고 이태왕 탄신식장에서 처음으로 연주에 성공하였는데 그 때 아버지의 작곡인 한국 국가, 기타를 연주하였다.... (중략)... 이 악단이 그 후 6개월만에 겨우 성립되었다.”
이에 관해서 1939년 12월 15일 조선일보에서 Eckert의 사위며 법어(法語)학교 교사인 Emile Martel (마태을 馬太乙 1874. 12. 4-1949. 9. 19)도 확인을 하였다.
9월 9일자 황성신문에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금반 만수성탄진연에 각국공영사 및 신사가 진참(進參)하였는데 친히 교성(敎成)한 악대가 주악(奏樂)하였고”
유일한 영문잡지였던 The Korea Review 1901년 9월 호에서
“이번 축하연에서 많은 내외의 귀빈이 모였는데 황제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하여 지난 9월 7일 아침에 궁정에 참석한 외국 손님들에게 특히 기억될 만한 순서는 새로 조직된 군악대의 첫 출연인 것이다. 이 밴드는 Dr Eckert의 지도로 훈련되었는데 모두 27명의 대원으로 단지 4개월 남짓의 연습으로 외국의 악기들을 그렇게 훌륭히 연주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특히 이 외국 손님들에게는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중략)...
날씬한 제복 번쩍번쩍하는 악기들 정확한 박자 흐르는 듯한 리듬과 하모니 이런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상상외의 효과를 올렸으며 청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박수갈채는 그칠 줄을 몰랐으며 이대로만 간다면 얼마 안 가서 이 악대는 동양에서 경쟁할 다른 악대가 없게 될 것이다...”
※ 1차는 광무 5년(1901년) 3월 나팔수 중에서 50명을 선발하여 4월부터 교육하였고 2차는 광무 8년(1904년) 봄에 일반인 중에서 50명을 모집하여 2개 소대를 만들었음.
이렇게 급진전한 군악대의 악기편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적(大笛. Flute)소적(小笛. Piccolo)호적(胡笛. Oboe)최고음생(最高音笙. Eb Clarinet)고음생(高音笙. Bb Clarinet)심음생(深音笙. Bass Clarinet)최고음나팔(最高音喇叭. Eb Pisiton)최강음나팔(最强音喇叭. Alto Trombone)강음나팔(强音喇叭. Tenor Trombone)조심음나팔(助深音喇叭. Baritone Saxophone)반심음나팔(半深音喇叭. Bass Trombone)
심음나팔(深音喇叭. Bass Saxophone)최저음나팔(最低音喇叭. Bass Tuba)철금(鐵琴. Glockenspiel)소고(小鼓. S.Drum)대고(大鼓. Drum)등고(藤鼓. Tambourine)제금(提琴. Cymbal)
이 당시 사용하던 악보는 전하여지지 않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나타난 당시 연주곡목은 다음과 같다.
각국의 국가: 대한제국, 일본, 영, 미, 불, 독, 노, 오, 비, 이, 영국국민가, 덕국국민가, 미국국민가. 행진곡: 대한국민행진곡, 일본국평상행진곡, 덕국평상행진곡, 입혼시행진곡, 즉위행진곡, 도전행진곡, 조례(弔禮)행진곡, 창가행진곡, 미국도무행진곡, 기병행진곡, 오국(奧國)평상행진곡. 가곡: 일본평상가5, 청국평상가곡, 덕국찬미가곡, 성회가곡2, 혼례가곡, 이별가곡, 평상가곡5, 완서곡(綬徐曲)3, 공사곡, 장서곡(長序曲), 잡가, 불국평상가곡, 이태리희루( )가곡, 사반아평상가곡2. 무곡: 영국회전무도곡2, 2절무도곡, 대무곡, 이절여흥무곡, 덕국회전무곡, 전약(轉躍)무곡, 소서전약(小徐轉躍)무곡, 반전무곡, 완무곡, 창흥무곡, 이태리국완무곡, 불국비전무곡.기타: 대한제국례호(禮號), 일본국장관례호, 군악참외국지제.
군악은 외국제도를 참용하여 모두 방언으로 번역하고 풀이했으므로 그 가곡을 지금 다 싣지 않는다 했다.
군악대는 지금의 정부종합청사 자리인 궁내부 시위대 건물의 일부를 사용하며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탑동공원(塔洞公園) 서편쪽 부지 일부에 세워진 군악대 건물로 광무 6년(1902년) 6월 12일 이사를 하였다. 그 후 광무 11년(1907년) 7월 31일 조칙으로 군대가 해산되면서 군악대도 해산되고 들어 있던 한식 와가(瓦家) 및 숙소 등은 폐옥처럼 방치되었다가 1921년 9월 9일 총독부로 부터 공원부지 531평(1,755㎡)과 건물을 무료로 빌려 이범승에 의해 초기 우리나라 근대 공공도서관인 경성도서관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재정곤란으로 경성부에 양도되어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으로 되고 해방후 시립종로도서관으로 되었다가 1967년 구건물은 철거되고 파고다 아케이드가 들어섰던 자리였다.
Eckert는 여기서 전 대원들에게 오전 3시간은 주로 음악이론에 관한 학과 교육을 하고 오후 3시간은 실기 등 쉴 새 없는 철저한 교육을 실시했다 한다. 군악대는 당초 목적처럼 군의 사기 앙양을 위하는데 그치지 않고 황실과 정부의 각종행사에도 연주를 하였다. 광무7년(1903년) 1월 3일 고종황제로부터 '대한제국 국가의 작곡과 음악교육을 위한 공로'로 3등 태극훈장을 받고 이후 2종의 훈장을 받았다.
이어서 초창기 군악대의 대원명단은 정사인, 김능창, 백우용, 이건호, 이동희, 정상옥, 김봉환, 강흥준, 임삼봉, 염학순, 정백남, 이순근, 서병희, 유순근, 편춘근, 박지엽이 알려져 있고 이중, 백우용(白禹鏞 1880∼1950)은 광무4년(1900년) 7월 7일 황성신문에 한성 관립덕어(德語)학교 하기시험에서 장석준(張錫駿)과 함께 1반 우등으로 금시계를 받는 우등생으로 재학중에 Eckert의 통역관으로 있었으나 대원들 통솔에 어려움이 있어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광무6년(1902년) 육군보병 참위(參尉 소위)에 임명되었고 8개월 후에는 부위(副尉 중위)로 승진하였고 광무8년(1904년) 5월에 3등 군악장이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군악대장으로서 지휘자가 되었다. 같은 해 9월에는 2등 군악장, 광무11(1907년) 3월에는 1등 군악장이 되었고 1910년 8월 29일 그 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장예원(掌禮院) 악사장 훈6등에서 훈5등으로 서훈되었으며 그는 Eckert의 수제자로서 클라리넷의 연주자, 작곡, 편곡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13년 9월부터 탑골공원에서 연주를 매주 토·일요일에 가졌으며 1914년 7월초부터는 매주 목요일을 택하여 오후 8시에서 10시까지 연주회를 가졌으며 1916년 직후까지는 백우용이 모든 행사를 주관하였다. 1918년에 극장 단성사(團成社) 신축기념으로 관현악단인 「단성사 악단」이 조직되었는데 지휘를 맡기도 했고 1926년 경성악대가 해산될 때까지 지휘를 맡았다. 1928년에는 「이왕직 아악부」(지금의 국립국악원의 전신) 촉탁으로 국악 채보를 전담하기도 했다. 그의 작곡인 「20세기 청년 여자 창가」는 1922년 경성 광문 서시(書市) 발행으로 42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상준, 김인식의 창가와 대동소이한 것으로서 반주는 없고 멜로디뿐이다.
정사인(鄭士仁, 1881∼1958)은 서울 태생으로 광무4년(1900년) 곡호대(曲湖隊)를 거쳐 광무5년(1901년) 대한제국 군악대에 들어가 플루트 연주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1912년 이왕직 양악대를 사임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중학부의 음악교사로 취임했으며, 1915년 개성 송도고보 교사로 취임하여 25년 간 후진을 양성했는데 이때의 송도고보 브라스밴드는 연희전문학교 주최 「전국 학생 음악경연대회」에서 항상 1등을 차지했다.
2.2 애국가 재정을 명하다
대한제국애국가의 제정 배경은 광무 6년(1902년) 1월 27일자 관보에 광무황제폐하의 의정부(議政府) 의정 윤용선(尹容善)에게 국가 제정을 명한 기사에서
“인심을 감발(感發)케 하고 사기를 쉬려함으로서 충성심을 돋구고 애국심을 진작함에 있어 성악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마땅히 국가의 절주(節奏 노래)를 제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문임(文任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으로 하여금 찬진(撰進)케 하노라”
이상과 같은 제정 명령이 있은 후 광무 6년(1902년) 7월 1일 민영환(閔泳煥)이 대한제국애국가발문(大韓帝國愛國歌跋文)을 붙였다.
“대저 성악(聲樂)이라는 것은 인심을 감동시키는 것으로서 언어와 문자로는 이에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군악이 있은 지는 오래 되었습니다만 널리 생각하옵건대 우리 황제폐하께서는 대업(大業)을 중회(中恢)하시었고 백방으로 유신(維新)을 이룩하셨으며 특히 군무(軍務)에 힘을 쓰시어 군악에 이르러서도 각국 성악을 참고하여 신보(新譜)를 엮도록 명하시었고 성율(聲律)에 밝은 덕국교사 예계덕(譽啓德)(터攄)으로 하여금 궁징(宮徵)을 심정(審定)토록하여 국지가(國之歌)를 울리게 하니 팔음(八音)이 잘 맞고 팔풍(八風)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모든 우리 군인이 이 노래를 부르면 그 뜻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소리가 장려(壯勵)한즉 분연히 용감하게 나서는 적개심을 생각하게 될 것이며 그 소리가 옹용(雍容)한즉 노력 정진하며 대중들과 화합함을 생각하여 모두가 용약(勇躍) 고무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충애지심(忠愛之心)이 유연히 생각나게 될 것입니다. 성악지도에는 이와 같음이 있사옵니다.
무릇 신(臣) 영환은 일찍이 부주(附注 악보)를 익히지 못하였고 조수(操綏 악기 연주)에 대하여 배우지 못한 터에 참군(參軍)으로 이 일에 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악보가 이미 이루어져 수자(繡梓 책을 꿰맴)되매 그 일 적어 책머리에 상자(上梓 머리에 붙임) 바입니다.
원수부 회계국총장 육군부장 정1품 훈1등 민영환”
2.3 대한제국애국가 원본 발견
대한제국 애국가의 악보 발견은 1968년 8월 7일 동아일보 기사에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金載元)박사에 의해서 광무7년(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 대표로 참석했던 정경원(鄭敬源)의 후손 정우택씨의 의뢰로 발견되었고 1970년 음악 평론가 이상만(李相萬)씨가 1987년에는 단국대 김원모(金源模)교수가 뉴욕 시립도서관에서 광무5년(1901년) 주한 미국 전권공사가 되었다가 광무9년(1905년) 을사늑약 체결후 귀국한 앨런( Horace Newton Allen 안련 安連 1859. 4. 23 ∼ 1932. 12. 2)문서 중에서 대한제국애국가 소책자를 확인하였는데 대한제국애국가는 표지까지 전부 10면으로 되어 있고 크기는 가로 23㎝ 세로 30.5㎝ 크기에 빨간색 비단 끈으로 묶어 매우 호화롭게 만들어 표지에는「大韓帝國愛國歌」라 쓰고 그 밑에 태극무늬 주위에 네 송이 채색 무궁화가 그려져 있고 그리고 독일어로 Kaiserlich Koreanische Nationalhymne 한국적인 모티브에 의한 대한제국애국가 왕실 프로이센 음악지휘자 Eckert 1902년이라고 되어 있고 2면에는 애국가 제정의 경위를 밝힌 민영환의 서문이 있고 3면에는 궁체로 쓰여진 가사와 그 아래에 독일어로 번역한 가사가 있고 4면부터는 애국가 악보가 실려 있다.
표지
2면
大韓帝國愛國歌跋文
元帥部 會計局總長 陸軍副將 正一品 勳一等 閔泳煥
3면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사 셩슈무강하사 해
옥듀를 산갓치 싸으시
고 위권이 환영에 뜰치
사 오쳔만셰에 복녹이
일신케 하소셔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소셔
Lyrics in German 독어 가사
Gott beschutze unsern Kaiser,
Dass sich seine Jahre mehren
Zahlos wie der Sand am Strande,
Der sich zur Dune haufet,
Dass sein Ruhm sich leuchtend breite
Weithin uber alle Welten,
Und das Gluck des Herrscherhauses
Tausendmal zehentausend Jahre
Neu mit jedem Tag erbluhe
Gott beschutze unsern Kaiser
대한제국 애국가 총보는 플루트. 클라리넷. 오보에 등 18개 악기 편성에 의한 18단으로서 3/4박자 34소절로 되어 있다. 제1소절에서 16소절까지는 Andante MM♩= 112, 제17소절에서 제25소절까지는 Allegretto MM┣= 64, 제26소절부터는 a tempo, 제30 소절부터 rit, 제34 소절부터는 dim으로 되어 있다.
제 3장
3.1 군악대의 명운
융희 1년(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은 무장해제 되고 9월1일자 포달(布達) 제160호로 군부소관 군악대를 혁파하고 그 대원들로 제실악대(帝室樂隊)를 조직하는 규정이 반포되었다. 군악대 폐지는 9월 4일 칙령 제20호로 군부소관 군악대 이하 관제 및 규정폐지건 반포로 군악대 창설 8년만에 해산되고 제실 양악대로 유지되다가 1910년부터 이왕직(李王職) 양악대(洋樂隊)란 이름으로 대원이32명으로 줄이고 1912년에는 27명으로 줄어들었다. 1915년에는 이왕직의 직제가 고쳐져 6과로 사무가 분장(分掌)되었는데 양악대는 장시사(掌侍司)에 속하였다.
1915년대 이왕직 양악대의 연주곡목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장 활발, 월후사자(일본악곡), 세미우라미스 서곡, 춘곡조, 극곡(劇曲)조, 바다 밖의 흰 돛대(일본악곡), 서곡 뽀루데지방어리, 스페인 무도곡, 육군암호, 일본국가 <기미가요> 등이며 이 곡목들을 수시로 바꾸어 가며 때로는 카알 친왕, 올페의 소녀, 칼맨낭자 원무곡, 탄호이저, 배우 창가행진곡과 같은 경쾌한 행진곡도 상당히 세련되게 연주를 하곤 했었다. 그러나 황실도 일제가 편성해주는 예산이 부족하여 더 이상 유지를 할 수 없어 1915년 12월 12일 해산을 하고 민간자영단체로 20인조 경성악대(京城樂隊)라는 이름으로 재조직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경비를 단원들의 희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당할 수 없어 각 학교 운동회 극장 같은 곳을 전전하며 몇 푼을 얻어 시민을 위한 악대로서 연주활동을 계속했는데 주로 외국의 행진곡 종류를 연주하였다.
본격적인 연주활동도 가졌는데 제1회 경성악대 주최 음악회가 1919년 11월 18일(화) 오후 7시 종로기독교청년회관(YMCA강당)에서 악대의 유지를 위한 모금음악회를 열기도 했는데 이렇게 민간의 유지회가 조직되어 모금운동에 나서 황실에서 3천원, 식산은행, 총독부 등의 후원으로 7, 8천여원을 받는 한편 베이스 가수였던 Smith 목사, 최동준, 김영환, 총독부인, 황실 사람들이 월 3천원 정도의 후원하여 다시 활기를 얻었으나 처음에는 체면상으로 얼마간 후원을 하다가 끊겨 각 대원들은 다시 운동회나 광고악대로 불려 다녔고 전 대원이 나가면 겨우 1백원 정도 15 ∼6 명이 나가면 50원 정도 받았다고 한다.
경성악대는 1920년 6월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에 정기적으로 시민위안 음악회를 탑동공원에서 열었고 중순에는 납량음악회도 열고 9월 9일에는 대음악회를 열었다. 1923년 8월에는 남산 탑동 장충단 세 공원을 돌아가며 음악연주를 갖기도 했는데 해마다 봄·여름·가을의 첫째 둘째 셋째주 목요일 오후 8시∼10시까지 연주회를 개최하는데 매월 첫째 목요일은 남산공원에서 둘째 목요일은 탑동공원 셋째 목요일은 장충단공원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동아일보 1923. 7. 28)
연주장소 및 일정은 다음과 같다.
남산공원: 8월 2, 12, 23일, 9월 2 ,13, 23일.
탑동공원: 8월 5, 16, 26일, 9월 6, 16, 27일.
장충단공원: 8월 9, 19, 30일, 9월 9, 20, 30일. (단 비가 오면 하루씩 연기)
10월 13일에는 YMCA에서 추계음악회를 가졌으며 김영환 윤심덕 윤기성 등이 출연하였다.
1925년 10월 12일에는 YMCA주최 정동합창단 연악회(硏樂會) 홍난파 김원복 안기영 왓츠 훗스 김종완 스투데니 김영환 안대선 출연하는 추계음악회에 연주를 했고 1926년 8월 13일에는 경성부 주최 부민(府民)위안 납량음악회를 가졌고 9월22일 경성일보 내청각(來靑閣)에서 연주회도 가졌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고난사를 그대로 겪으면서 끝내 이 악대를 지키던 소수 대원들은 굶주림과 멸시 속에 1926년까지 명맥을 이어오다가 그 후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하여 각기 학교에 들어가 음악교육을 담당하며 경성악대의 72점의 악기를 기증 받은 휘문고보와 배재고보 경신학교 중동학교 등에 밴드부가 조직되고 일부는 이왕직에 보관하고 있다가 해방이 되자 서울시 경찰악대에 기증하였다.
3.2 Franz Eckert의 여정
광무 6년(1902년) 4월초 아들 셋은 독일 기숙사에 남겨두고 세 딸을 데리고 입국한 부인과 처음에 서학현(西學峴) 지금의 태평로 부근 거예원(擧隸院) 건너편에 살다가 후에 회현동에 살았는데 1916년 1월에는 군악대와 제실악대 편성에 공이 큰 이왕직 양악대 음악교사 Eckert는 만기로 해임되어 황실에서 위로금으로 50원 귀국 여비금으로 900원 기념품 비로 500원을 하사하여 그의 다년간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러나 8월 6일 위암으로 65세의 일기로 타계하니 순종황제는 100원을 하사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합정동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혔다.
한편 부인은 Eckert 사후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덕어(德語)교사 Bolljahn과 독일로 귀국을 하고 광무9년(1905년) 2월 7일 명동성당에서 법어(法語)교사 Emile Martel과 결혼한 장녀 Amalie Martel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남편이 1943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천진에서 해방을 맞을 당시까지 회현동 집에서 피아노 개인지도로 근근히 살았고 1947년 2월에 Martel이 돌아와 프랑스 영사관에서 근무하던 중 1949년 9월 19일 서대문 집(전 이기붕씨 가옥)에서 남편은 73세의 일기로 숨을 거둬 역시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외손녀 임마쿨라타(Immaculata, 본명 Marie Louis Martel) 수녀는 경북 경산시 성베네딕트 수녀원 경산분원에 있었으며, 장남 Charles Martel은 1982년 1월 파리 교외 Maisons-Alfort에 거주하고 있었다.
3.3 각종 문헌의 애국가 가사
여러 문헌에 조금씩 다른 애국가 가사들을 볼 수가 있는데 일제의 탄압으로 악보가 없어 정확하게 전승이 될 수 없었고 시대적인 상황으로 일부 가사의 변천도 있었다.
1904년 5월 13일자 황성신문 기사에 「학부에서 각 학교 애국가를 정리하기 위하여 각 학교에 신칙(申飭)하되 군악대에서 조음한 국가를 효방(效倣)하여 학도를 교수(敎授)하라 하난대 그 국가는 여좌(如左)하니」
상뎨(上帝)난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셩슈무강(聖壽無疆)하*샤
해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싸*으소셔
위권(威權)이 환영( 瀛)에 떨치샤
오쳔만셰(敖千萬歲)에 복록(福祿)이
무궁(無窮)케 하*소셔
상뎨(上帝)난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 ; 아래아, 떨; ㅅ+덜
◆ 「1904. 5. 13 황성신문」
상뎨여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반만년의 역사 배달민족
영원히 번영하야
해달이 무궁하도록
셩디동방의 원류가 곤곤히
상뎨여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 을사늑약(1905년) 정미칠조약(1907년)이후 것 추정.
상제난 우리 大韓을 도으소셔
獨立富强하야 太極旗를
빗나게 하옵시고
權이 환瀛에 떨치여
어천만세( 千万 )에 自由가
永久게 하소셔
상제난 우리 大韓을 도으소셔
◆ 1914년 발행 광성중학교 최신창가집
1925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의 학예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 중략 -
現代에 無窮花
그러나 근화 즉 무궁화를 지금과 가치 무궁화라고 쓰게 되기는 극히 짧은 근대의 일이라 합니다.
아마 지금부터 이십오륙뇬 전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게 되어 양인의 출입이 빈번하게 되자 그 의 선진이라고도 하든 윤치호(尹致昊)씨 등의 발의로 '우리 대한에도 국가(國歌)가 잇서야 된다고' 한편으로 양악대도 세우고 한편으로 국가도 창작할 태여난,
上帝(상제)가 우리 皇上(황상)도으사
海屋籌(해옥주)를 山(산)가치 싸흐소서
權(권)이 ○瀛(환영)에 ○치사
億千萬歲(억천만세)에 永遠無窮(영원무궁)하소서
라는 노래의 부속듸여 생겻다고 하는, '東海(동해)물과 白頭山(백두산)이 마르고 달토록'이라는 애국가의 후렴인, '無窮花三千里(무궁화 삼천리) 華麗江山(화려강산)' 이라는 구절이 끼일 때에 비로소 근화 근화, 즉 무궁화를 '無窮花(무궁화)'라고 쓰기 시작한 듯 하담니다.
- 중략 -
상뎨여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반만년의 역사 배달민족 영영히 번영하야
해달이 무궁하도록 셩디동방(聖地東方)의
문명의 원류(源流)가 곤곤(滾滾)해
상뎨여 우리 나라를 도으쇼셔
◆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 음악춘추사│1985.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샤 셩슈무강하사
해옥듀를 산갓치 꼬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쳔만셰에 복녹이
일신케 하소셔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소셔
◆ 『애국가 작사자 연구』 김연갑│집문당│1998.
上帝난 우리 皇帝를 도우소서
聖壽無疆하나 海屋等을 山갓치 싸으소서
威權이 환瀛에 떨치사
於千萬歲에 福祿이 無窮케 하소서
上帝난 우리 皇帝를 도우소서
◆ 『대한제국사 연구』 이대 한국문화연구원편 1999.
◆ 「대한제국시대의 한독관계」 홍순호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사
셩슈무강하샤 해옥듀를
산갓치 받으시고
위권이 황영에 싸치사
오쳔만세에 복녹이
일신케 하소셔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소셔
◆ 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무이사 김연갑 │2000. 4. 15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으소서
성수무강하사 애옥주를
산같이 받으시고
위권이 한양에 덜치샤
어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서
◆ 우리 양악 100년 이강숙 김춘미 민경환│현암사│2001
상제난 우리 황제를 도으소셔
성수무강하샤 해옥주를
산갓치 싸으소셔
위권이 환영 떨치샤
어천만세에 복록이
무궁케 하쇼셔
상제난 우리 황제를 도으소서
◆ 한국음악통사 송방송│일조각│2001
※ 각주
상뎨(上帝): 하늘을 다스리는 신, 하느님 God
셩슈무강(聖壽無疆): 聖壽: 황제의 나이, 수명. 황제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말. Long Life of His Majesty.
해옥듀(海屋籌): 시위기병대 군악대 애국가 중에서 해우동방(海偶東方)이라는 말로 봐서 나라의 산(算)가지: 나라의 지혜의 성스러운 표현?
위권(威權): 위엄과 권세, 위광과 권력. Dignity and Athority.
환영(環瀛): 사해(四海)와 같은 빙 둘러싼 큰 바다, 온 세상
복록(福祿): 타고난 복과 녹(삶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
God Save The King
“God save our gracious Queen!
Long live our noble Queen!
God save the Queen!
Send her victorious,
Happy and glorious,
Long to reign over us,
God save the Queen!”
대한제국 애국가는 1902년 Franz Eckert 작곡, 민영환이 책임자로 있는 문임(文任)에서 작사한 것으로 영국 국가 God Save The King 처럼 첫 행과 마지막 행의 반복이 같이 나타나고 특히 길이가 7행인 것과 상뎨가 God의 번역으로 보아 영국국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영국국가는 1745년에 최초로 연주된 국가로부터 시작되었다. 가사는 국가에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공식 행사에서는 보통 1절만 부른다.
≪참고문헌≫
『우리 양악100년』이강숙 김춘미 민경환 현암사 2001, p35 ~ 53, p94 ~ 102·KBS1의 '수요기획'「부르지 못한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원본」 2000. 3. 7. 밤12시(주)코리아 아트센터 대표 박성미(36)제작. 335- 0238∼9 docukorea@hotmail.com, 마포구 동교동 LG팰리스 1202호「서울육백년사」 http://seoul600.visitseoul.net 서울시『새로운 한국음악사』전인평 현대음악출판사 2000 +, p 319 ~ 326KBS "일요스페셜"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이나? 1999. 2 28.SBS "출발 모닝와이드"의 "VJ김민선의 현장보고, 불황전략 세계에서 배운다"코너.
8.15특집극 Eckert의 자료 수집중. 비디오 저널리스트 김민선(35)프로덕션 1998. 5. 6.『한국음악사』예술원, 1985. 5 p. 529『獨逸東亞細亞會誌』12월호 1926 Fanz Eckert mein Vater der Composist der Japanischen National Hymn Kimigayo
※ 주석
德國의 國民歌(別報)
在倫敦 鐵脚生
鐵脚生이 일즉 德國 토른에라는 地方에 遊하다가 農夫와 水夫가 歌曲相和하는 聲을 聞하고 氣가 自奮하며 肩이 自聳하야 耳를 傾하고 靜聽하나 言語를 不解하는 故로 其 歌曲의 意味는 不知하고 但只 山岳을 動하는 歌曲의 音調만 耳에 入하는지라. 鐵脚生이 無限한 遺憾을 拘하얏다가 後에 伯林에 遊할새 又 란街 小兒가 前日과 如한 歌曲을 唱하는지라. 鐵脚生이 壹 友人을 訪하야 其 歌曲의 意味를 問하고 因하야 記하얏노라.
大抵 此歌는 德國 國民歌니 德國에는 官民老少男女를 勿論하고 恒常 창和하야 茶飯으로 供하는 歌曲이니 其 歌曲을 聞하더라도 德國이 世界强國으로 東西를 虎면하는 原因이 其 國民에게 在함을 可知하갯도다.
今에 其 歌曲을 譯述하노니 飜譯이 能치 못하며 曲調가 合하지 못하나 다만 其 人民의 勇壯한 氣力과 活潑한 精神을 思惟컨대 此 歌曲을 唱하며 起舞를 不巳할지로다.
德國國民歌
(壹)
우뢰갓한 소래귀에 마쳐
병쟝긔를 霹靂갓치 부드지며
으라인(國權) 으라인德國 으라인
뉘가 너를防備할고 으라인아
後斂 두려말아 父母國아
으라인 把守 여긔잇스니
걱정말아 사랑하는 조국아
으라인 把守 굿게 셧다.
(二)
勇猛잇는 튜톤民族
여러 마음 壹체 奮發
冒險하기 연습하야
祖國疆土 직히여라.
(三)
千萬番 죽을 지라도
法國百姓을 아니될지라
끌는피 으라인의 洪水되야
英雄의血 대德國에 가득하리.
(四)
놉히보라 뎌하늘에
九쳔英雄내려 본다
世전之物 일치 마셰다
德國 가삼으로 방패삼아
(五)
德國 피가 식기 前에
德國環刀 무듸지 안코
德國 砲手銃을 들졔
德國따에 발부칠 敵兵 업네
(六)
흘너가는 시내물에
有進無進盟誓하고
우리 國旗 놉히 들어
나아가셰 으라인으로.
철각생이란 가명 아래 간접적으로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일본인을 배척하여 자주 독립할 것을 촉구하는 글이다.
● 8음(八音)의 재료에 따른 분류
'증보문헌비고'에서는 8음의 주요 재료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8음이란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토(土), 혁(革), 목(木)의 8가지 재료를 일컫는 말이다.
금(金):쇠붙이로 만든 악기이다. 종류로는 편종(編鐘), 특종(特鐘), 방향(方響), 징(鉦:정), 꽹과리, 나발(喇叭)등이 있다.사(絲):공명통(共鳴筒)에 명주실로 꼬아 만든 줄을 얹어 만든 악기이다. 거문고, 가야금, 금(琴), 슬(瑟), 해금(奚琴), 대쟁(大箏),
아쟁(牙箏), 월금(月琴), 당비파(唐琵琶), 향비파(鄕琵琶) 등이 있다.
Reference: 1960년대 말까지 한국에 생존했던 Franz Eckert의 외손녀, Immaculata Martel 수녀 이야기
대한제국 국가(國歌): 대한뎨국 애국가, 大韓帝國愛國歌의 역사
http://online4kim.net/xe/?mid=bbs_pub&page=22&document_srl=17721</기미가요></러일전쟁사진화보>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121261
흔히 덕수궁(德壽宮)이라고 하면 시청 앞의 대한문 쪽으로 들어가는 궁궐을 떠올리게 되지만 한때 덕수궁의 권역은 언덕 너머 서대문 방향의 경희궁(慶熙宮)으로 죽 이어지는 곳까지 미치고 있었다.
현재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어 있는 덕수궁의 지정면적이 미처 2만 평을 넘기지 못하지만, 원래 덕수궁 권역이었던 '정동 1번지' 일대를 몽땅 합친다면 그 면적은 4만 평을 훌쩍 넘긴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 <경성일필매지형명세도>에 표시된 정동 일대의 현황이다. 붉은 표시는 선원전과 사성당이 있던 '정동 1-24번지'(즉 지금의 미국부대사관저)이고, 파란 표시는 흥덕전과 흥복전이 있던 '정동 1-8번지 일대'(즉 예전의 경기여고 자리)이며, 검은 표시는 의효전이 자리하던 '정동 1-6번지'(즉 지금의 덕수초등학교)이다. 그리고 위쪽의 분홍표시는 영성문이다.그러했던 것이 어쩌다가 덕수궁은 이토록 쪼그라든 몰골로만 남은 것일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리 복잡할 것도 없어 보인다. 덕수궁의 영역을 한껏 확장한 것이 고종임금의 뜻이었다면, 그러한 궁궐이 해체되기 시작한 것 역시 고종의 죽음 그 자체에서 비롯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말하자면 주인을 잃어버린 궁궐의 운명이란 것은 이미 거기에서 절반쯤 정해진 것이나 다를 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식민통치자들의 속내가 실제로 그러했던 것이라면 궁궐로서의 기능은 더 이상 유지되기가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이 그러했다. <매일신보> 1920년 1월 19일자에는 '덕수궁의 처분문제'에 대해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 이왕직차관(李王職次官)이 그 입장을 표명한 내용이 하나 수록되어 있다.
▲ 신문로1가 세안빌딩 쪽에서 덕수궁 안길로 들어서는 곳에 영성문(永成門)이 있었다. 진입금지 표지판이 서있는 곳이 영성문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그 너머에 보이는 4층건물이 '덕수초등학교'이고, 그 오른쪽으로 담장만 살짝 보이는 곳이 예전의 '경기여고 자리'이다.ⓒ 이순우"덕수궁은 현재대로 영구히 보존하는 외에 달리 처분할 길이 없다. 그래서 일년제가 마치시면 차차로 세상에 문제가 되겠는데 장래 총독부가 경복궁 안으로 옮기게 되면 태평통은 경성전시의 중심점이 되어 덕수궁도 물론 그 요지가 되겠는데, 어떻든지 경성시중 뛰어난 곳의 토지를 일만 팔천 평이나 되는대로 놀려두기는 경성번영상에도 심히 유감천만인 듯하오. 건물 정원 등의 보존비도 연연히 막대한 숫자를 나타내는 바 결국 장래는 궁안의 한쪽 필요한 건물 있는 지역을 젖혀놓고 다른 것은 떼어내어 민가를 세울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궁안에 있는 이조역대의 초상을 모신 선원전은 당연히 창덕궁에 옮기려고 불원에 이전할 차로 창덕궁 안에 그 기지를 선정하는 중이오 또 이왕전하의 웃대를 제사지내는 의효전도 창덕궁에 옮기기로 되었는데, 이 건물을 이왕가에는 필요한 건물로서 기타 이, 삼은 반드시 둘 건물이 있고 석조전 같은 굉장웅대한 건물은 이것을 움직이기 어려우므로 그대로 무엇에든지 쓰겠지요.
또 이같이 필요치 않은 부분은 떼어내어 장사하는 집이 세워지게 되면 경성의 번영상 진실로 기꺼운 일인즉 좋기는 좋으나 아직 이런 의논을 전혀 없고 혹 한, 두 사람의 조선인이 거짓말을 전파한 덕수궁 불하문제가 아주 성가시게 되었는데 전혀 형적도 없는 일이나 어떻든지 일주년제가 마치면 무슨 의론이 있겠지요."
이때가 바로 고종임금이 승하한 지 겨우 1년을 넘기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덕수궁의 선원전에 모셔진 역대국왕의 어진들은 1920년 2월 16일에 창덕궁의 선원전으로 모두 옮겨졌고, 그 직후 영성문(永成門) 안쪽의 선원전 일대를 두루 헐어내는 공사가 진행된 바 있었다. 이른바 '영성문 대궐'이라고 부르던 선원전 권역은 그 무렵부터 사실상 기능이 정지된 상태에 들어갔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윤치호일기> 1919년 11월 22일자에는 "(이왕직장관을 지낸) 민병석과 (이왕직찬시를 지낸) 윤덕영이 덕수궁 즉 고종황제의 궁궐과 영성문 안쪽의 인근 부지를 일본인들에게 팔았다고 하여, 이 비열한 매국노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거다"라고 적어놓은 대목이 들어있는 것을 보면, 실제로 덕수궁의 해체작업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착착 진행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 운동장이 보이는 곳이 예전의 경기여고 자리이고, 그 너머로 언덕진 곳이 미국대사관 부대사관저 지역이다. 미국대사관과 대사관 직원아파트를 짓는다고 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선원전 옆에 있던 흥덕전(興德殿)의 전각은 창덕궁의 외전 행각을 보충하는데 쓰겠다고 1919년 겨울에 벌써 그곳으로 헐어내 갔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렇게 진작에 덕수궁, 특히 선원전 권역은 해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정동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가 개수(改修)된 것도 바로 1920년 여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동아일보> 1921년 7월 25일에는 아주 특이한 기록이 하나 보인다.
"서대문통에 고색이 창연하게 서 있던 '영성문'이 헐리기는 작년 여름의 일이다. 지금은 그 영성문 자리로부터 남편으로 정동까지 탄탄한 신작로가 새로이 뚫려있다. 이 신작로의 왼편 대궐자리에는 지금에 절이 되어 '선원전'의 뒤편자리에는 금칠한 부처님이 들어앉았다. 일시 정치풍운의 중심으로 동양의 주목을 모으는 '수옥헌'은 외국사람들의 구락부된 지가 이미 오래지마는 외국사신접견의 정전으로 지었던 '돈덕전'은 문호가 첩첩이 닫힌대로 ...운운."
여기에는 선원전이 있던 쪽에 난데없이 '절'이 들어섰다고 적혀 있다. 이에 관한 소상한 기록이 없으니 뭐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불과 1년 전까지 궁궐이었던 곳에 어찌 절이 들어설 수 있는 것인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절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또 언제까지 존속한 것인지 정말 궁금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를 확인할 만한 단서는 잘 보이질 않으니 별 도리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 <대경성사진첩>에 수록된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왼쪽)와 '덕수공립보통학교'(오른쪽) 시절의 전경이다. 덕수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기 이전에는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였다. 이들 학교가 정동지역에 이전한 것은 1922년이었다.그런데 선원전 권역의 해체를 촉진했던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뭐니뭐니해도 이곳이 학교부지로 활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원래 흥덕전(興德殿)과 흥복전(興福殿)이 있던 지역에는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가 들어섰고, 신작로 건너편의 의효전(懿孝殿)이 있던 곳에는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가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이때가 바로 1922년 봄이었다.
원래 남산동 2가 2번지 즉 지금의 남산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경성공립고등여학교'가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라는 이름으로 고쳐 정동으로 이전해 온 것이 1922년 5월 13일이었는데, 이 과정에 대해서는 <조선> 1922년 11월호에 간략한 기록이 하나 남아 있다. 여기에는 "1921년 9월에 기공하여 이듬해 3월에 전부 준성(竣成)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부지는 1921년에 매수면적 2418평 7합 이외에 총독부가 양여한 것으로 15평이 있었고, 1922년에는 다시 인접지 1063평 2합을 매수하여 합계 3496평 9합에 달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고 표기되어 있다. 말하자면 1921년과 1922년에 매수한 부지는 '정동 1-8, 1-13, 1-14, 1-15번지'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 자리는 해방 이후에 '경기여자고등학교'가 있던 곳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해방 이후의 일이었을 뿐이지 그 이전에는 두 학교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이를테면 정동 1-8번지에는 일제시대를 통틀어 줄곧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가 있었을 따름이었다.
▲ <매일신보> 1926년 5월 23일자에 보도된 덕수궁의 은행나무. 1926년 12월에는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의 뒤편 언덕에 '경성방송국'(정동 2번지)이 들어섰다. 그런데 그 자리에 큰 은행나무가 걸리적거리자 이를 '베어버리자, 돈이 들더라도 다른 곳으로 옮기자'하는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은행나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이와는 달리 길 건너편의 덕수초등학교 쪽은 그 연혁이 좀 더 복잡하다. 원래 서대문 밖 충정로1가 34번지에 있던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가 '정동 1-6번지'로 옮겨온 것이 1922년 4월 12일이었다. 그러니까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정동 지역으로 진입한 것이라고 보면 될 듯싶다.
그런데 이 학교는 1935년 봄부터 남녀공학으로 변경되는 동시에 '덕수공립보통학교'가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학교 이름에 '덕수'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이때부터이다. 그에 앞서 인근의 서소문로 76번지에 있던 '정동공립보통학교'와 합병이 시도된 흔적이 여러 군데 보이긴 한데,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1940년 4월 26일에는 화재발생으로 학교가 전소(全燒)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여하튼 지금의 덕수초등학교는 그러한 내력을 지녔다.
그렇다면 선원전과 사성당이 있던 '정동 1-24번지'는 어떻게 변했던 것일까? 1921년 무렵 그곳에 절이 들어섰다는 <동아일보> 보도기사가 있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구체적인 흔적을 찾아내기가 좀체 쉽지 않다. 다만 약간 세월이 흐른 다음 1934년 12월 24일에 이르러 조선저축은행이 이 터를 인수하여 중역사택을 짓는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니까 이곳이 지금의 미국대사관 부대사관저가 있는 곳이다.
<조선과 건축> 1938년 7월호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정동 1-39번지 1333평의 대지"에 이 건물이 지어진 것으로 적혀 있다. 원래 선원전 구역은 '정동 1-24번지'인데다 그 면적도 4348평이나 되었던 것인데, 살펴 보건대 나중에 지번분할이 이루어졌고 그 일부에다 조선저축은행의 사택이 건축되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런데 이 구역은 어쩌다가 미국대사관의 구역으로 편입되었던 것일까? 몇 가지 자료를 뒤져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는 막강한 위세를 떨치던 미군정 시절의 힘이 있었다. <서울신문> 1948년 9월 19일자에는 '한미행정이양협정에 의해 미국이 취득한 토지건물의 명세' 제하의 기사가 하나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정동지역과 관련된 사항만 추려보면 대충 이러했다.
"(가) 미군가족 주택 제20호 급 대지(138평) 정동 1의 39
(나) 러시아인 가옥 제1호(720평) 정동 1의 39
(다) 현재 미국영사관 서편 공지(1414평) 정동 1의 9
(라) 현재 미국영사관 남편 공지, 서울구락부에 이르기까지 현재 미국영사관 곁으로 통한 도로의 일부, 정동 8의 1, 8의 3, 8의 4, 8의 5, 8의 6, 8의 7, 8의 8, 8의 9, 8의 10 및 8의 17
(마) 미군가족 주택 제10호 급 러시아인 가옥 제1호 정동편에 있는 삼각지형 대지 급 기타 지상에 있는 창고 1동, 가옥 3동 급 기타 건물(1675평) 정동 1의 39
(바) 전군정청 제2지구 전부 급 기타 지상에 있는 약 43동의 가옥 급 기타 건물. 차는 차지역에 있는 식산은행 소유재산 전체를 포함한 정동 9의 1 전부, 사간동 96, 97의 2, 98, 99, 102, 103의 1, 104의 1, 급 104의 2 급 그 대지상의 기타 건물 약 9915평
(사) 반도호텔 급 그 동편에 연접한 주차장 1944평 을지로 18의 2."
이렇게 본다면 결국 선원전 자리가 있던 곳은 물론 미국공사관을 둘러싼 인근지역에 있던 예전의 덕수궁 자리가 광범위하게 통째로 미국대사관의 구역 안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일은 거기에서 그치질 않았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경기여고가 있던 자리가 재산교환의 형태로 미국대사관 측에 넘겨졌다. 이러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 지난 1986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또 이번에는 이 자리에 미국대사관과 대사관 직원용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여 말썽이다. 그러고 보니 고종임금의 죽음을 계기로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해체된 덕수궁 즉 선원전 권역의 태반이 유독 미국대사관 측으로 몽땅 다 넘겨진 셈이다. 그것도 불과 6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말이다. 결국 덕수궁의 해체는 일제의 식민통치자들을 위한 것도 서울시민을 위한 것도 아닌, 그저 미국대사관을 위한 일이 되고야 말았던 것이 아닐까?
아, 영성문대궐(永成門大闕)의 운명(運命)이여!
<매일신보> 1920년 5월 11일자에는 '전대무주야초반(殿臺無主野草班)!! 영성문대궐(永成門大闕)의 운명(運命), 모래 한 알갱이도 주인을 생각하는 듯한 이 대궐! 이를 차마 어찌하나?'라는 제목이 나붙은 기사가 하나 들어 있다. 여기에는 선원전 일대가 헐어지는 당시의 상황이 비교적 소상히 묘사되어 있다. 전각과 출입문의 배치현황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고 여겨진다. 다음은 그 기사의 전문이다.
이 대궐(大闕)은 십대왕(十大王)과 민비(閔妃)를 모시는 존엄한 대궐
영성문(永成門)대궐! 이 대궐은 어떠한 대궐인지를 우리가 생각하는가? 이 대궐 안에는 우리이조 역대제왕 가운데 칠대왕(七大王)과 영희전에 뫼시었던 삼대왕(三大王)과 창덕전하의 민비전하(閔妃殿下)의 높으신 사당을 뫼시고 친히 봉사하옵시던 존엄무비의 대궐이었다.
그러나 일한합병이 된 뒤로는 무슨 까닭으로 역대선왕께 봉사하는 전차까지도 폐하게 되었었는지? 십년 동안을 두고 오늘까지 이르도록 춘추봉사를 폐지하고 다만 해마다 새절기에 생기는 과실(果實)과 새곡식이 나면 그때마다 천신 차례나 행하여왔었다.
그러나 원래 소중한 대궐인고로 형식상으로 전사(典祀)와 수북 등의 직원은 두었었다. 그러나 이태왕 전하께옵서 승하하옵신 후로 일주년이 못되어 영성문대궐과 덕수궁(德壽宮) 일부를 민간에 불하하리라는 문제가 세상에 전하여 졌었다.
그러나 덕수궁의 일부를 불하한다는 말은 전혀 풍설이요. 다만 영성문대궐만 식산은행(殖産銀行) 사택지로 불하하였으나 이것도 필경은 양방이 해약함에 이르렀음으로 소위 양궁불하문제는 아주 없어지고 말았는데 이와 같이 사회의 일대문제거리가 되던 영성문대궐의 운명은 과연 어찌 되었는가?
무령(無靈)한 부월(斧鉞)이 피금전옥루(彼金殿玉樓)를 함부로 헐고 마나?
우리 민간의 사사집이라도 화려한 건물을 훼철하는 것은 눈으로 보기에 좋지 못하여 보이는 것이 우리의 인정인데 하물며 이와 같은 역사 있는 궁궐이리요. 영성문이라는 뚜렷한 액자가 걸린 숭엄한 삼문은 보기 싫은 널판조각으로 둘러막고 그 정문까지도 헐어 없애버리게 되었는데 요사이 수십명의 역부가 들어덤비여 영성문 안에 크나큰 전각을 날마다 훼철하여 모든 재목과 기와를 마차에 실어서 내이는 중이다.
그리하여 어소문(於昭門) 안에 태조(太祖)대왕, 숙종(肅宗)대왕, 영종(英宗)대왕, 정종(正宗)대왕, 순조(純祖)대왕, 익종(翼宗)대왕 일곱 분의 사당 뫼시었던 선원전(璿源殿)의 장엄한 전각도 모두 훼철하며 좌우 행각까지도 장차 훼철하겠으며 정안문(靜安門)을 들어서서 유정문(惟靖門) 안에 창덕궁 민비전하의 사당을 뫼신 의효전(懿孝殿)의 숭엄한 전각과 동행각과 재실까지 모두 훼철하였고 또는 홍대비(洪大妃) 전하와 민비 엄비 전하의 삼년상을 받들은 역사가 소여한 회안전(會安殿) 같은 곳까지도 순서대로 불일 훼철하겠으며 소안문(昭安門) 안에 흥덕전(興德殿)은 홍대비국상이 계시옵셨을 때에 빈전(殯殿)으로 불일 성지를 하여 지었던 전각으로 민비의 빈전으로도 지냈으며 또는 엄비 빈전도 되었던 역사 있는 전각인데 이 전각은 창덕궁에 조하는 외전(外殿) 행각을 건축하는데 보충하여 쓰려고 작년 겨울에 훼철하여 창덕궁으로 옮겨간 고로 흥덕전 자취는 벌써 쓸쓸한 바람에 잡초만 발이 빠지게 되었다.
창덕궁 북일영(昌德宮 北一營)에 신조(新造)되는 선원전(璿源殿) 십이실로 만든다
그러면 이와 같은 존엄한 궁궐은 왜? 그와 같이 훼철하여 화려하고 장엄하던 영성문대궐도 황량한 벌판이 되게 하는가? 본래 이 대궐에 뫼시었던 선원전과 의효전을 창덕궁 뒤편에 있는 북일영(北一營)에다가 옮기여 지으려고 그와 같이 모든 전각을 헐어서 창덕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북일영에 새로이 건축하는 선원전으로 말하면 본래 일곱 대왕의 존령을 뫼셨던 터임으로 칠실(七室)의 선원전이었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오실(五室)을 늘이여 십이실의 큰 전각을 건조하실 것인 고로 그와 같이 제일 큰 전각만 모조리 헐어가며 심어지 돌 한 개까지라도 남기지 않고 모두 북일영으로 옮기여 가는 터이로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짓는 선원전 어찌하여 십이실로 변경을 하는가? 영희전대궐에서 영성문대궐 사성당(思誠堂)으로 이안하옵셨는 삼실은 북일영에 새로 짓는 선원전에 뫼실 터이며 나머지 이실은 당분간 비워 두었다가 승하하옵신 이태왕 전하의 존영을 뫼실 터이요 또 일실은 장차 앞날에 어찌 될는지? 혹시 창덕궁 전하께옵서 승하하옵시면 나머지 일실 듭시게 될는지? 이것은 우리가 아직 알 수 없는 바이다.
두견성 두견성(杜鵑聲 杜鵑聲)! 무량(荒凉)한 궁전(宮殿)의 적(跡), 뜰 아래 풀도 한을 머금어
아! 영성문대궐의 운명! 이후로부터는 우리가 날마다 배관하던 영성문이랑 숭엄한 궁궐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도다. 벌써 지금부터 그 대궐 안에는 처량스러운 봄풀만 푸르렀고 화려하던 궁궐은 모든 경색이 처참하게 되었도다.
전일 이태왕전하께옵서 생존하옵셔 완전한 다례를 하옵실 때에 친히 궁중을 납시여 덕수궁 후원을 넘으사 유녕문(由寧門) 어로를 통과하옵셔 며느님의 영존이 계신 의효전을 가끔 살피시고 백화가 난만한 화원과 그 외에 모든 화초를 기르는 온실과 기타 양어지(養魚池)를 친히 어람하시며 존엄하신 옥체를 머루르시던 곳은 몸이 파묻히는 망초가 슬픔에 매치인 듯하며 울울창창한 모든 녹음은 사랑하던 주인을 잃고 풀이 없이 늘어진 듯하도다.
그 중에도 전일 왕세자전하께옵서 수학하시던 수학원(修學院)의 건물은 반을 떼리여 어떤 서양인의 소유가 되어 시꺼먼 판장으로 막았으며 나머지 일부도 불일간 헐어 없앨 터인데 그 한편에는 테니스의 운동장을 닦느나고 법석을 하는 모양도 과연 한심하게 보이는데 유녕문 앞에 푸르러있는 은행나무(銀杏木)는 때마다 이태왕 전하의 용안을 지영하던 역사를 말하는 듯 하였다. 아, 영성문대궐의 무르녹은 녹음은 장차 누구를 위하여 길이 푸르러 볼까?
실시간 불난 이태원.jpg ... 실시간 불난 이태.gif.
+국악누리12월호 내지표23포함 - 국립국악원
www.gugak.go.kr/.../dict_20101114140...
추는 일'과'조선 건국에 힘쓴 역대 왕들의 치적을 기리기 위한 ..... 작곡가 이태원太王'이나 순종의.
아버지 역시 태황제 대신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한제국 황실 ..... 조선군 토벌대는 군란에 참가한 병사들의 근거지인 왕십리와 이태원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풀어 ..
주말에 이태원에서 친구들 모임이 있는데 다들 주당이라... 소주마시기 괜찮은곳 어디 없을까요?? 뭐.
일반적으로 고종은 이태왕(李太王)이라 하여 이왕과는 별도로 호칭하였다. 한반도 최후의 군주 직위였으나 보통 한반도의 .
http://www.historynews.kr/sub_view.html?page=16&local=§ion=§ion2=&keyword=&level&n_id=admin&n_name=&t_le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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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석인 1919년 장례시 까지 설치 안됨, 이태왕전하장의사진첩 1899년 중수석물로 추정되나, 1900년 동물상과 함께 ...
철종을 이은 임금(희)이 나라이름을 바꾸고 뒤에 왕권까지 왜인에게 넘겼다. 일본귀족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숨졌다.
대한제국 고종
편집
고종 : 이태왕(李太王), 1910년~1919년순종 : 1910년 ~ 1926년 6월영친왕 : 1926년 6월~1947년이왕세자영친왕 : 1910년 10월 1일 ~ 1926년 4월 25일이구 : 1931년 12월 29일 ~ 1947년이왕세손이진 : 1921년 8월 18일 ~ 1922년 5월 11일
고종은 이태왕(李太王)이라 하여 이왕과는 별도로 호칭하였다
이왕(李王)은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 사용되던 직위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의 황족을 일본의 황족이자 왕으로 대우하면서 붙인 칭호이다. 일반적으로 고종은 이태왕(李太王)이라 하여 이왕과는 별도로 호칭하였다. 한반도 최후의 군주 직위였으나 보통 한반도의 통치자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이태왕